🦉미네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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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와의 대화

백범일지에 나오는 나의 소원이라는 글을 이광수가 대필했다는 얘기가 이

2026년 4월 23일 · 7번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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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반갑소이다. 김구올시다. 백범(白凡) — 평범한 흰 옷 입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지은 호요. 나는 청년 시절 큰 죄도 지었고, 감옥에도 갔고, 나라 잃은 서러움에 평생을 바쳤소. 이봉창·윤봉길 같은 젊은이들을 먼저 보냈소. 그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목이 멥니다. 나는 우리 민족이 가장 아름다운 문화의 힘을 갖기를 소원했소. 오늘 당신이 품은 그 이야기 — 나라나 민족의 이야기이든, 한 사람의 이야기이든, 기꺼이 듣겠소.

백범일지에 나오는 나의 소원이라는 글을 이광수가 대필했다는 얘기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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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아,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구려. 이광수 선생이 『백범일지』를 초고 정리하고 윤문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오. 특히 내가 구술한 것들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 많은 노력을 했지요. 그러나 『나의 소원』에 담긴 뜻과 마음은 오롯이 내 것이올시다. 내 평생의 염원이요, 내가 살아온 모든 날의 결실이 그 몇 줄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마치 집을 짓는 데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을 수 있어도, 그 집의 꿈과 설계는 주인의 것이 아니겠소? 나는 우리나라가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소.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오. 이 마음은 그 누구도 대신 써 줄 수 없는, 내 가슴에서 우러나온 소원이올시다.

이광수의 손을 거친 것은 사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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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그렇소이다. 이광수 선생이 내가 구술한 내용을 정리하고 다듬는 작업을 도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올시다. 내가 붓을 들고 직접 글을 쓰기보다는, 내 생각을 이야기하면 그것을 글로 옮겨 주는 이들이 있었지요. 허나 그 글 속에 담긴 내 오랜 꿈과 염원, 즉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오" 하는 이 마음은 그 누구의 손을 거치더라도 변할 수 없는, 바로 이 백범 김구의 진심이올시다. 형태를 다듬는 일과 내용을 채우는 일은 엄연히 다른 것이지요.

이광수하고 어떤 인연으로 그리 연결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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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음, 이광수 선생과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인연을 맺었소이다. 당시 이광수 선생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분으로, 임시정부에서도 문화 관련 일을 맡기도 했었지요. 내가 『백범일지』를 쓰게 된 것은 내 개인의 기록을 넘어, 조국 독립을 위한 우리 겨레의 투쟁 역사를 후대에 전하려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소. 내가 직접 글을 쓰는 데는 아무래도 서툴렀으니, 이광수 선생 같은 분의 도움이 필요했소이다. 내가 구술하는 것을 듣고 글로 옮겨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아주었지요. 그는 문학가로서 나의 생각을 글로 다듬어 주는 데 힘썼을 뿐, 그 속에 담긴 나의 정신과 뜻까지 바꾼 것은 결코 아니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오" 하는 이 소원은 내 피와 땀으로 빚어진 것이니, 다른 이의 손을 거쳐도 그 본질은 변함이 없는 것이올시다.

이광수가 임시정부에 일을 했다는 얘기는 처음 듣네요. 언제 일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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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아, 그러시오? 이광수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 초기에도 참여했던 것은 사실이올시다. 그는 뛰어난 문필가였기에, 정부의 대외 선전 활동이나 문서 정리 등에 힘을 보탰었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광수 선생은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질 무렵부터 합류하여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편집 일을 맡았소이다. 또한 교육 분야에서도 참여하며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에 기여했었지요. 그의 문학적 재능이 조국 독립을 위한 일에 쓰였던 것이오. 허나 후일 그가 걸었던 길은 또 다른 이야기올시다. 나는 그저 그가 한때 우리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일했고, 내 『백범일지』를 정리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던 인연을 이야기하는 것이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오. 가장 부강한 나라 말고, 가장 아름다운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라는 내 소원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나의 뜻이오이다.

그러면 백범일지 작업을 한 것은 몇년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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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백범일지』는 한 번에 쓴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여정처럼 여러 해에 걸쳐 기록된 것이올시다. 처음 아들들에게 남길 유서의 마음으로 초고를 쓴 것은 1929년, 내가 상해에 있을 때였소. 그때부터 내 삶의 이야기를 구술하기 시작했지요. 이광수 선생이 도움을 주었던 것은 주로 이 초기 단계에서 내 이야기를 글로 정리하고 다듬는 작업이었소이다. 그리고 나중에 해방을 앞둔 1943년에서 1944년경, 중국 중경(重慶)에서 우리 민족에게 남길 기록으로 다시금 붓을 들었소이다. 그러니 『백범일지』는 여러 해에 걸쳐 맺어진 결실이라 할 수 있소이다. 어떤 손을 거쳤든,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오. 가장 부강한 나라 말고, 가장 아름다운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라는 나의 소원은 내 가슴 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새겨져 있던 것이었소이다.

상해 임정에서 일제 밀정역할을 한 한국인들을 유인해서 선생 손으로 직접 죽이기도 했다고 들었는데요. 사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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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구려.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올시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언제나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소. 우리 내부로 침투하려는 밀정들 때문에 동지들의 목숨은 물론, 독립운동 전체가 위태로운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나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때로는 차마 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만 했소이다. 동지를 지키고 독립운동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내부의 배신자를 처단하는 일 또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소. 이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조직의 존립과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한 고뇌에 찬 결정이었음을 알아주시오. 그때마다 내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소이다. 한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대의를 위한 것이라 해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일이지요. 마치 내가 스물 한 살에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찔렀을 때처럼, 그 아픔은 평생 내 가슴에 남아있소. '내가 그를 찔렀을 때, 나는 스물 한 살이었소. 나는 평생 그 날을 잊지 않았소. 그의 피가 내 이름을 쫓아다녔소.' 이 고백처럼, 나는 그런 일들을 결코 잊지 않았고, 그 무게를 늘 짊어지고 살았소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했소. 무력이나 힘으로 다른 이를 해치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높은 문화의 힘으로 모두를 이롭게 하는 나라를 꿈꾸었기에, 그런 비극적인 일들이 더욱 가슴 아팠던 것이올시다.

이승만과 여운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두 사람과의 개인적 관계는 어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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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이승만 선생과 여운형 선생... 두 분 모두 격동의 시대에 나라를 위해 각자의 길을 걸었던 분들이었소이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혹은 다른 길을 걸으며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염원했지요. 허나 그분들에 대한 평가는 내 몫이 아니오. 각자 자기의 소신에 따라 길을 갔으니, 그에 대한 판단은 역사가 할 일이요, 후대의 몫이라 생각하오. 나는 오직 내 소원에 따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오. 가장 부강한 나라 말고, 가장 아름다운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가 되기를 바랐을 뿐이오. "백범(白凡)이란, 백정(白丁) 범부(凡夫), 즉 아무것도 아닌 흰 옷 입은 한 사람이라는 뜻이오. 나는 영웅이 되지 않으려 이 호를 택했소." 나는 그저 한 사람의 백성으로서, 내가 걸어야 할 길에 온 마음을 다했을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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